중국에서는 시가 다음과 같은 문헌에 보이기 시작하였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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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-06-26 17:00 조회4,324회 댓글0건관련링크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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중국에서는 시가 다음과 같은 문헌에 보이기 시작하였다.
≪춘추좌씨전≫의 소(疏)에서는
“≪상서 尙書≫에서 국 끓이는 데 매실과 소금만을 쓴다고 하였다. 옛날의 조미료는 매실과 소금이고 시는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.”고 하였다.
또, ≪예기≫의 내칙(內則)이나 ≪초사 楚辭≫의 소혼(招魂)에는
음식에 관한 이야기가 그렇듯 많이 나오는데도 시에 관한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.
그러다가 한대(漢代)의 ≪급취편 急就篇≫이라는 책에 비로소 염시(鹽豉)라는 말이 나온다. 이로 미루어 시는 진한대(秦漢代)부터 중국에 나타나게 된 것이라 하겠다.
시는 중국 자체에서 개발한 것은 아닌 것 같다.
진대(晋代)의 ≪박물지 博物誌≫에서는 시를 외국원산이라 하였다. 송대(宋代)의 ≪학재점필 學齋佔畢≫에서도 구경(九經) 속에 시라는 글자가 없고, 방언(方言)에 시가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.
중국으로 보아서는 시란 외래품이라 하겠다.
≪사기≫의 화식전(貨植傳)에 의하면 일반 제조업자의 이윤이 10분의 2 정도인 데 비하여 시 제조업자의 이윤은 10분의 5에서 10분의 3 정도나 된다고 하였다.
시의 재료가 본디부터 알려진 것이라면 그렇게 많은 이윤이 있을 리 없다. 따라서, 시 제조업자는 외래의 시 제조의 비결을 가지고
있었기 때문에 이윤이 커서 부자가 된 것으로 추측된다.
고구려사람이 발효식품을 잘 만들고, 발해의 명산물로서 시를 들고 있으며, 콩의 원산지가 동이권이고 중국사람 스스로 시를 외래품이라고 한 것을 생각하면 오늘날의 청국장에 해당하는 것이 매우
오랜 역사를 가지고 이 땅의 북부에서 싹터 중국에 가서 시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.
그러므로 본디의 중국의 장은 해란 이름의 육장이고,
우리의 장은 시란 이름의 두장(豆醬)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.
중국인들이 두장을 시라 표현한 까닭은 ≪석명 釋名≫의 석음식(釋飮食)에 보면 “시(豉)는 시(嗜 : 즐긴다는 뜻)와 같은 음이다.
오미(五味)를 조화하는 데 시를 쓰면 그 맛을 즐길 수 있다.
따라서 제나라 사람들은 시(嗜)와 같은 음인 시(豉)를 쓴다.”고
한 것에서 알 수 있다.
500년 초엽의 ≪제민요술 齊民要術≫에 보면 구체적인 시 제조법이 기록되어 있다.
즉, 콩을 삶아 익혀서 어두운 방에 놓아두면 곰팡이가 번식하여
황의(黃衣)가 덮이게 되고 단백질이 분해된다.
이것을 씻어서 균사(菌絲)를 제거하고 짚이 깔려 있는 움 속에 놓아두면 짚에 붙어 있는 낫도균 등에 의하여 콩성분이 더욱 분해되고 점질물(粘質物)도 생성된다.
이것을 햇볕에 말린 다음에 물에 우려내어 조미료로 쓰기도 하고 건조시키지 않고 그대로 쓰기도 한다.
오늘날의 청국장과 매우 비슷함을 알 수 있다.
우리 나라 삼국시대의 장에 대한 기록은
≪삼국사기≫ 신라 본기 신문왕 3년(683)에, 왕이
김흠운(金欽運)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는데 납채(納采)로서
미(米)·주(酒)·유(油)·밀(蜜)·장(醬)·시(豉)·포(脯) 등 135수를 보냈다는 내용에 보인다. 여기에서는 시와 장을 구별하고 있다.
[네이버 지식백과] 장 [醬] (한국민족문화대백과, 한국학중앙연구원)
≪춘추좌씨전≫의 소(疏)에서는
“≪상서 尙書≫에서 국 끓이는 데 매실과 소금만을 쓴다고 하였다. 옛날의 조미료는 매실과 소금이고 시는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.”고 하였다.
또, ≪예기≫의 내칙(內則)이나 ≪초사 楚辭≫의 소혼(招魂)에는
음식에 관한 이야기가 그렇듯 많이 나오는데도 시에 관한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.
그러다가 한대(漢代)의 ≪급취편 急就篇≫이라는 책에 비로소 염시(鹽豉)라는 말이 나온다. 이로 미루어 시는 진한대(秦漢代)부터 중국에 나타나게 된 것이라 하겠다.
시는 중국 자체에서 개발한 것은 아닌 것 같다.
진대(晋代)의 ≪박물지 博物誌≫에서는 시를 외국원산이라 하였다. 송대(宋代)의 ≪학재점필 學齋佔畢≫에서도 구경(九經) 속에 시라는 글자가 없고, 방언(方言)에 시가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.
중국으로 보아서는 시란 외래품이라 하겠다.
≪사기≫의 화식전(貨植傳)에 의하면 일반 제조업자의 이윤이 10분의 2 정도인 데 비하여 시 제조업자의 이윤은 10분의 5에서 10분의 3 정도나 된다고 하였다.
시의 재료가 본디부터 알려진 것이라면 그렇게 많은 이윤이 있을 리 없다. 따라서, 시 제조업자는 외래의 시 제조의 비결을 가지고
있었기 때문에 이윤이 커서 부자가 된 것으로 추측된다.
고구려사람이 발효식품을 잘 만들고, 발해의 명산물로서 시를 들고 있으며, 콩의 원산지가 동이권이고 중국사람 스스로 시를 외래품이라고 한 것을 생각하면 오늘날의 청국장에 해당하는 것이 매우
오랜 역사를 가지고 이 땅의 북부에서 싹터 중국에 가서 시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.
그러므로 본디의 중국의 장은 해란 이름의 육장이고,
우리의 장은 시란 이름의 두장(豆醬)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.
중국인들이 두장을 시라 표현한 까닭은 ≪석명 釋名≫의 석음식(釋飮食)에 보면 “시(豉)는 시(嗜 : 즐긴다는 뜻)와 같은 음이다.
오미(五味)를 조화하는 데 시를 쓰면 그 맛을 즐길 수 있다.
따라서 제나라 사람들은 시(嗜)와 같은 음인 시(豉)를 쓴다.”고
한 것에서 알 수 있다.
500년 초엽의 ≪제민요술 齊民要術≫에 보면 구체적인 시 제조법이 기록되어 있다.
즉, 콩을 삶아 익혀서 어두운 방에 놓아두면 곰팡이가 번식하여
황의(黃衣)가 덮이게 되고 단백질이 분해된다.
이것을 씻어서 균사(菌絲)를 제거하고 짚이 깔려 있는 움 속에 놓아두면 짚에 붙어 있는 낫도균 등에 의하여 콩성분이 더욱 분해되고 점질물(粘質物)도 생성된다.
이것을 햇볕에 말린 다음에 물에 우려내어 조미료로 쓰기도 하고 건조시키지 않고 그대로 쓰기도 한다.
오늘날의 청국장과 매우 비슷함을 알 수 있다.
우리 나라 삼국시대의 장에 대한 기록은
≪삼국사기≫ 신라 본기 신문왕 3년(683)에, 왕이
김흠운(金欽運)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는데 납채(納采)로서
미(米)·주(酒)·유(油)·밀(蜜)·장(醬)·시(豉)·포(脯) 등 135수를 보냈다는 내용에 보인다. 여기에서는 시와 장을 구별하고 있다.
[네이버 지식백과] 장 [醬] (한국민족문화대백과, 한국학중앙연구원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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